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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까를로스의 땅고 이야기 - 오르께스따 띠삐까와 황금기

hugjun 2013. 6. 27. 00:54

안녕하세요? 까를로습니다.

땅고 이야기는 오랫만인데...요즘 한글 환경에 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도배 중입니다. 죄송...^^

집에 쓰다만 얘기가 있는데...무시하고 다시 쓰죠. 오래돼서 기억도..@@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오르께스따 띠삐까는 30년대 초반부터 사람들과 더 다양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Teatro(떼아뜨로:극장-코메디 뮤지컬)과 Cine(시네:유성영화-땅고 관련 혹은 땅고 그 자체) 그리고 각종 Club(끌룹:클럽, 이후 끌룹) 혹은 Cabaret(까바레:캬바레, 이후 까바레) 등을 통해서...

 

이러한 상황들이 기존의 섹스떼또(6인 구성: 2반도네온, 2비올린, 1꼰뜨라바호, 1삐아노)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띠삐까의 구성(4반도네온, 4비올린, 1꼰뜨라바호, 1삐아노)으로 자리를 잡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10명이 넘는 경우도 많았음)

특히, 춤을 추는 공간에서는 Cafe(까페:카페, 이후 까페)보다 더 풍부한 사운드가 필요하였기에...

 

 

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오르께스따 띠삐까는 점점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다. 

아니 그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다리엔쏘(그의 오께스뜨라 생략)의 리드미컬한 연주는 춤 추는 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고, 37년에 발매된 음반(La pun~alada 라 뿌냘라다, La cumparsita 라 꿈빠르시따)는 무려 백만장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그 당시 전체 인구가 천만 정도였다는데...@@

 

다리엔쏘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고, 사람들의 취향이 그렇다보니 다른 오께스뜨라의 연주도 자연스레 리드미컬쪽으로 바뀐다. 게다가 해를 거듭할 수록 마치 유행인양 점점 빨라지는...

이는 1940년도를 전후로 녹음된 그들의 곡(특히 연주곡)을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Di Sarli(디 사를리)는 물론 De Caro(데 까로)까지...^^

 

1943년 무렵에서야 비로서 picadita(삐까디따:아주 빠른) 연주가 한풀 꺽이기 시작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밤을 수 놓았던 띠삐까의 선율은 하얗게 지세웠던 밤의 수보다 더 많은 라이브를 바탕으로 각자의 독특한 색깔을 갖는다.   

 

Cafe(까페, 이후 까페)에서 끌룹으로, 또, 어떤날은 Radio(생방송)로 그리고 까바레로,

하루 저녁에 두세 곳의 연주는 보통이었으니...

악보없이 연주하는 것은 기본이요, 음반녹음도 무슨 친구들 약속하듯 그냥 만나서 했다고 한다.^^

 

그때의 모습을 잠시 언급하자면

일간지에 그들의 연주 스케줄을 알리는 면이 따로 있었고, 

전용 미니 버스로 그 바쁜 스케줄을 달렸으며,

인기 있는 오르께스따가 연주하는 곳은 항상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좋아 하는 가수가 새로 데뷰하는 밤은 그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몇 블럭이나 이어졌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잠 못들게 하였을까??

 

아마도 뛰어난 Compositor(꼼뽀시또르:작곡가) 혹은 Arreglador(아레글라도르:편곡가)과 시적인 Letrista(레뜨리스따:작사가),

이를 연주하는 Musico(무시꼬:뮤지션, 이후 무시꼬)와 노래하는 Cantante(깐딴떼:가수, 이후 깐딴떼),  

그를 듣고, 함께 노래하고 혹은 그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Tanguero(땅게로) 

 

이 모든 것들이 숨쉬는 공기(Aire:아이레)와 어우러져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가득 채웠기 때문은 아닐까??

 

Tanguero Carlos en Bs.As.

 

 

실은, 지난 번 마지막에 언급한 사대천왕 얘기를 할까 했는데, 황금기에 대해 소개를 하다보니 힘들게 되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질거 같아서...^^

대신 여러분께 재밌는(?) 문제를 하나 내죠.

 

사대천왕은 과연 누구일까요?

 

정답을 맞추시는 분들께는 조그마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럼 행운이...

출처 : 라틴속으로
글쓴이 : 까를로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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